의뢰인의 말,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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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변호사 작성일22-09-26본문
서울에서 개업을 하고 처음으로 맡게 된 사건이었다. 의뢰인은 남편과 함께 우리 사무실을 찾아왔는데, 상당히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어떤 일로 오셨는지 물었는데, 의뢰인의 옆에 앉아 있던 남편은 격양된 목소리로 자신의 아내(의뢰인)가 직장 동료로부터 강간을 당했다고 말했다.
사건 당일, 회사 회식자리가 길어지면서 의뢰인이 자신의 몸을 가두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하게 되었는데 이를 본 의뢰인의 직장 동료가 의뢰인을 모텔로 데려가 성폭행을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의뢰인은 아예 만취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의식도 어느 정도 있었고 당시 상황에 대한 기억도 남아있었는데, 분명히 거절의 의사표시를 하였지만 직장 동료는 술에 취해 저항할 여력이 없는 의뢰인을 힘으로 제압했다고 한다.
의뢰인의 남편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나는 의뢰인을 한 번 쳐다봤다. 실제 사건의 당사자인 의뢰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이상했는데, 오히려 의뢰인은 자신이 죄를 지은 마냥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사건 수임계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고소장 작성에 착수하였다. 그 과정에서 구체적인 사실관계 파악을 위해 의뢰인과 자주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변호사로서의 직감이라고 해야 하나, 평소 그 직장동료와의 관계는 어땠는지, 성폭행을 당하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무언가 어색하고도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의뢰인과 가해자의 관계가 단순한 직장 동료는 아닌 것 같다는 느낌. 물론 나는 의뢰인이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이라는 전제하에 고소장을 작성하였다.
고소장을 접수한 후 고소인 조사가 있던 날, 의뢰인은 자신이 겪은 피해사실을 진술하는 과정에서도 무언가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성범죄 피해자가 경찰서에 출석해서 침착하고 조리 있게 자신의 피해사실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동안 보았던 의뢰인들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우리는 수사기관으로부터 피의자(직장 동료)에 대해 기소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처분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그 이유인 즉 피의자는 이 사건으로 경찰조사를 받게 되면서 자신이 의뢰인과 내연관계라는 주장을 했는데, 피의자가 제출한 카카오톡 메시지나 전화 녹음 등의 내용을 보면 피의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당일에도 의뢰인과 피의자는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진 것이었다.
불기소처분을 받은 직장 동료는 의뢰인을 무고로 고소하였다. 그리고 무고죄 상담을 위해 홀로 사무실에 찾아온 의뢰인은 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건 당일 의뢰인과 피의자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의뢰인의 남편은 이를 추궁했고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던 의뢰인은 성폭행을 당했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 남편은 당연히 그 직장 동료를 고소하기로 마음먹었고 우리 사무실에 찾아와 나에게 직장 동료가 강간죄로 처벌받게 해달라며 사건을 의뢰하게 된 것이었다.
의뢰인과 변호사간의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사건을 풀어 가는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나는 의뢰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뢰인의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변론 방향을 정한다. 그러나 변호사의 입장에서도 의뢰인의 주장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단순한 의심을 넘어 확신에 가까워진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의뢰인의 말이 사실이 아님으로 인해 받아들이게 될 참혹한 결과는 온전히 의뢰인의 몫이다.
변호사로서 의뢰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다소 의심이 들더라도 의뢰인의 말을 끝까지 믿고 가야하는 것일까. 변호사와 의뢰인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