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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이 씌인 것 같은 안타까운 참사에서 만난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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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준 변호사 작성일2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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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에 서울로 이사를 간 후 20년간 서울에 살아서 그 어떤 동네보다 익숙한 곳이 서울인데 서울에 계시던 부모님이 귀농하시고, 서울 사는 누나가 하늘나라로 간 이후 서울에 일정이 있어서 가족들을 데리고 올라올 때마다 처제네 집 방 한칸을 빌려야했다. 우리 가족이 편하게 묵을 수 있도록 침대도 따로 설치해주고, 언제 와도 반겨주는 처제와 동서 덕분에 서울에 일이 생기는 것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지난 10월 어느 일요일 처제네가 마련해준 우리 가족 전용침대에서 잠에서 깨어 뒹굴거리다 핸드폰을 보았는데, 새벽에 부재중 통화와 함께 전화를 해달라는 친한 형님 문자메세지가 와있었다. 경험상 이런 연락이 와있을 때에는 법적으로 문제될 좋지 않은 일이 생겨서 휴일임에도 다급한 마음에 연락을 할 때가 많은 편이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드렸는데, 내 예상과 같이 형님의 가족 중에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이 생긴 것이 맞았다. 그렇지만 그 사고는 내 예상을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

군대를 다녀와 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형님의 아들은 친구들과 근교에서 커피를 마시고 저녁을 먹으러 차를 몰고 가다가 차량의 통행이 많은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다가 직진을 하는 차량의 뒷부분을 충격해버렸다. 앞에서 차를 몰던 다른 친구는 좌회전신호를 기다리기 위해 대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아들은 직진신호를 좌회전신호로 인식하고 앞에 있는 친구가 왜 좌회전을 안하지라고 생각하며 직진차선에서 좌회전을 해버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경찰에서 본 블랙박스에는 명확하게 직진신호로 되어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악령이 씌이면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하듯이 분명 직진신호였음에도 그 아들은 좌회전신호로 인식하고 아무런 고민 없이 좌회전을 한 것이었다. 직진신호에 따라 직진을 하던 SUV차량의 뒷부분을 충격하여 그 SUV차량은 20미터를 구르게 되었다. 삼거리를 거의 통과할 무렵 뒷부분을 충격하였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나는 상황을 거의 인지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차에는 40대 부부와 어린 딸이 타고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차에서 튕겨나가 현장에서 돌아가시는 참변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전화로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사고로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다른 운전자의 잘못으로 이런 사고 상황에 놓인다면 과연 대비할 수 있을까? 여태껏 이런 사고를 겪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

 

경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본 블랙박스 영상은 그날의 참변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처음 이 사고를 들으면서부터 형님은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구체적으로는 아들이 감옥에 가게 되는지를 궁금해 하셨는데 합의가 안되면 실형이 불가피하지만, 합의가 되면 집행유예를 기대해볼 수 있다고 희망적인 답변을 드리긴 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론 합의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령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 자녀들이 유족으로서 합의가 되는 확률이 높지만, 이 사건과 같은 경우엔 아내와 엄마를 잃은 아픔 때문에 합의를 시도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쌍욕을 먹고 폭행을 당하는 상황을 감수하더라도 피해자측과 접촉을 하지 않으면 합의는 요원하다고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었는데, 어렵게 연락처를 알게 된 피해자의 남편분은 놀라울 정도로 선한 분이셨다. 내가 그 분의 입장이었어도 과연 저렇게 대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딸을 잃은 슬픔에 잠겨있는 부모님 때문에라도 합의를 도저히 해주기 어렵다는 말씀에 합의를 계속 요청 드리는게 너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결국 더 나아가지 못했다. 다만 나중에라도 마음이 좀 바뀌시면 꼭 좀 연락을 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드릴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주가 지나고 그 남편분에게 연락이 왔다. 형님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고 하시며 합의를 안해주면 그 운전자는 어떻게 되냐는 것이었다. 합의를 한다고 무조건 집행유예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합의를 못하면 감옥에 가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란 답변을 드렸다. 조심스러운 대화 끝에 피해자분을 만날 수 있었고, 어렵게 어렵게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그 남편분은 가해자나 가해자 부모님을 만나는 것을 여전히 원하지 않았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어서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기면 그게 나중에 자신의 딸에게 불행으로 이어질까봐 어렵게 마음을 먹었다고 하셨다. 아직 너무 젊은 그 운전자의 남은 인생을 걱정해주시는 모습에서 천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 순간이었다. 모쪼록 이런 불행한 사고는 다시는 없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