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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가스라이팅(Gas-lighting)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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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준 변호사 작성일2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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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까지는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요새 참 많이 들리는 단어다.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 <가스등(Gas Light)>라는 연극에서 유래된 용어라고 한다. 가스라이팅은 가정, 학교, 연인 등 주로 밀접하거나 친밀한 관계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 수평적이기보다 비대칭적 권력으로 누군가를 통제하고 억압하려 할 때 이뤄지게 된다. 사람들이 부부나 연인, 친구 등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게 마련인데, 가스라이팅은 피해자의 기억을 지속적으로 왜곡하거나 문제의 원인을 의도적으로 피해자에게 있다는 식으로 자존감과 판단능력을 잃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악의적이다.

 

지난주에 누나와 함께 찾아온 의뢰인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오히려 불편할 만큼 부상에 따른 통증을 안고 있는 상태였는데, 그 부상은 사회에서 알고 지낸 2살 차이 동생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 전모를 듣고 나니 시사고발프로그램에 소개를 해도 될 정도의 사안이었다. 그 동생은 다소 어리숙한 의뢰인을 철저하게 이용하였다. 의뢰인이 벌어온 돈에서 일부씩 자기에게 보내도록 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무시와 협박을 일삼았다. 반말은 기본이고, 욕설을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 동생은 과거에 의뢰인을 무고하기도 하였는데, 변호사를 선임하여 어렵게 무혐의를 받고 관계를 정리하였다가 최근 들어 모르는 번호를 이용하여 다시금 연락을 했다고 한다. 의뢰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가족들이 의뢰인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세뇌시키려고 했다. 자신의 폭행으로 골절상을 입은 의뢰인에게 그건 일을 하다가 다친 것이라는 기억을 주입했고, 의뢰인은 그걸 따라서 대답하도록 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근거를 만들어놓는 치밀함까지 보인 것이다.

사건을 듣고 있으니 내 가족이 당한 것과 같은 분노가 몰려왔다. 이 사건을 맡아서 그 동생으로부터 신변보호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한 다음 공갈과 폭행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해줘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의뢰인이 사용하던 휴대전화를 일일이 확인하면서 최대한 증거를 촘촘하게 구성해야겠다는 계획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 같이 동생으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던 또 다른 피해자가 의뢰인으로부터 흉기폭행을 당했다고 신고를 하여 피의자의 신분인 사건이 하나 더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피해자로서 공갈, 강요, 상해의 피해를 입은 사건, 흉기에 의한 폭행 가해의 혐의를 받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첫 번째 사건은 고소대리인(또는 피해자변호사)로서, 두 번째 사건은 피의자의 변호인으로서 활동을 하게 되는데, 절차도 개별적이고 활동해야 하는 일도 별도가 된다는 점이 고민이었다.

 

합리적인 비용을 받지 못하더라도 의뢰인을 돕고 싶다는 마음과 이 사건을 처리하는데 들어갈 시간과 정력을 고려해야 한다는 마음이 충돌하고 있었다. 공익적인 사건의 경우 재단에서 보조를 받는 방법까지 안내해주며, 의뢰인의 경제적 부담을 줄여드리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고, 의뢰인과 누나는 가족과 상의를 한 후 연락을 주기로 하였다. 며칠이 지나서 연락을 드렸을 때 의뢰인의 누나는 내게 사건을 부탁하고 싶었지만, 다소 부담이 돼서 예전에 의뢰를 했던 변호사님께 사건을 다시 맡기게 되었다고 했다. 수임료는 비슷한데 성공보수가 부담이 되었다고 했다. 처음 제안했던 금액이 아닌 수용 가능한 금액을 받고 진행하려고 연락을 드린 것인데 허탈하기도 하면서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처음부터 솔직히 터놓고 얘기했더라면.. 보수를 좀 덜 받더라도 무조건 처리해드리겠다고 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보다 열심히 노력하니까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에 사로 잡혔던 것은 아닐까 자문해보았다. 얼마 전까지 리뷰한 천원짜리변호사처럼 사는 것은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뢰인의 억울함이 잘 해결되길 빌면서 더 이상 이런 아쉬움이 남지 않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