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가 사건을 포기하면 이길 수 없다.
페이지 정보
유달준 변호사 작성일22-12-13본문
지난주에 대여금 사건의 항소심 선고가 있었다. 대여금 사건은 변호사들이 처리하는 민사사건에서 가장 간단한 축에 속하는 사건이다. 판결문을 받더라도 집행가능한 상대방의 재산이 없는 경우가 왕왕 있지만, 상대적으로 승소판결을 받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여금사건은 돈을 빌려주는 ‘금전소비대차’라는 법률행위가 있었을 것, 그에 따라 금전을 교부하였을 것이라는 2가지 요건을 입증하면 원고측의 입증책임은 기본적으로 완성된다. 첫 번째 요건사실의 주요증거는 ‘차용증’이 될 것이고, 두 번째 요건사실의 주요증거는 금융거래내역 등이 될 것이다. 헤어진 연인들 사이에서 사귀던 시절에 교부한 돈을 두고 차용증 등의 명백한 증거가 없을 때 ‘증여’냐 ‘차용’이냐를 두고 다투는 경우가 있지만 문자나 카카오톡메세지, 통화녹음 등에서 “갚겠다”라는 말을 한 사실이 있다면 차용사실을 인정받기는 크게 어렵지 않다.
지난주에 선고가 있었던 사건은 구조적으로 매우 어려운 사건이었다. 우리 의뢰인은 대여금 사건의 피고였는데, 상대방에게 차용증을 작성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로서 첫 번째 요건사실은 그대로 입증이 돼버린다. 두 번째 요건사실이 문제였다. 의뢰인은 상대방에게 2억원을 빌린 사실이 없기 때문이었다. 숨겨있는 사실관계는 이러했다. 의뢰인과 상대방을 포함한 네 명이 십 몇년 전쯤에 웨딩컨설팅사업을 동업으로 하였다. 운영이 잘 안돼서 결국 사업을 접기로 했는데 의뢰인이 혼자 남아 사업을 이어가기로 하면서 기존에 투자를 했던 동업자들의 정산이 문제가 되었다. 가장 많은 돈을 투자했던 상대방에게는 돈을 벌어서 5천만원을 주겠다고 하였는데, 독촉이 심해져서 대출을 받아 지급을 해주고 마무리를 지었다.
그 뒤로 의뢰인은 사업을 열심히 하여 망하기 직전이던 웨딩컨설팅 사업을 가까스로 살려냈다. 상대방의 배우자와는 지인관계였는데 상대방의 배우자는 의뢰인에게 수시로 돈을 빌리고 갚았다. 나중에는 의뢰인의 후배 돈을 빌려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동업을 정산한지 10년이 지났을 무렵 상대방과 상대방의 배우자는 지인들로부터 빌린 돈을 갚지 못해 형사고소를 당하는 등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상대방은 의뢰인을 찾아와 못받은 돈이 있다면서 5천만원을 추가로 지급해줄 것으로 요청하였다. 의뢰인이 이를 거절하자, 시골에 계신 연로한 의뢰인의 부모님을 찾아가서 시시비비를 가려보겠다. 1인 시위를 하겠다며 겁을 주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배우자는 실제로 의뢰인의 부모님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지병 등으로 건강이 좋지 않으셨던 부모님이 스트레스를 받아 어떻게 되실까봐 너무 겁이 났던 의뢰인은 결국 부모님부터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상대방의 요구대로 2억원을 지급하겠다는 차용증을 작성해주고 말았다.
지금부터 2년 전에 상대방은 위 차용증을 증거로 2억원의 지급을 구하는 대여금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우리는 차용증을 작성한 사실은 있지만 실제 돈을 빌린 사실이 없고, 이는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로서 취소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맞섰다. 원만한 해결을 도모하는 조정절차에 회부되었는데 쓰지도 않은 돈의 절반 이상을 갚으라는 제안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1심은 판결이 선고되었고 결론은 2억원을 지급하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돈을 빌리지는 않았지만 동업정산금을 빌린 것으로 대신하는 ‘준소비대차’의 합의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었고, 상대방이 부모님을 찾아가거나, 1인 시위를 하는 등의 행위를 한 사실은 있지만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로서 취소할 정도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당방위만큼 강박에 의한 법률행위로서 취소를 인정하는 것에 인색한 법원의 입장 그대로였다.
항소를 제기했지만 계속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로서 취소되어야 한다는 주장만을 주야장천 미는 것은 의미가 없어보였다. 법률서적, 주석서 등을 보며 몇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준소비대차에 있어 기존채무가 부존재 또는 소멸된 경우에 새로운 채무가 성립될 수 없다는 법리적 주장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제는 동업정산금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주장을 어떻게 입증해야하는지에 관한 과제가 남은 것이다. 첫 번째로는 당시에 동업을 했던 사람을 증인으로 불러서 상대방에게 5천만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동업정산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였으나, 두 사람간의 분쟁에 끼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증인출석을 거부하였다. 결국 차용증 작성 이후에 또 다른 동업자와 나눈 통화내용을 녹취록을 만들어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는 설사 상대방의 주장처럼 동업정산금이 남았다고 하더라도 이는 상사소멸시효 5년이 완성되었다는 논리를 구성하였다. 차용증에 기초한 1심 판결로 의뢰인의 아파트도 경매로 넘어갈 상황에 처해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이겨야 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정의를 위해서라도 이기고 싶었다. 직접 작성해준 차용증의 위력이 이렇게 큰 지 알았다면 의뢰인도 그때는 작성을 끝까지 거부했을 것이다.
1년에 걸친 1심 소송, 또 1년이 걸린 항소심 재판 끝에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상대방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구조적으로 너무나도 불리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소송대리인인 나조차도 반신반의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끝에 극적인 역전승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의뢰인은 울며불며 내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셨지만 나로선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고 정의로운 결과를 내려주신 재판부에 거듭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형식적인 판단으로 우리의 주장을 배척하는 판사를 만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도 감사를 드렸다. 올해 받은 민사사건 선고 중에 가장 극적인 결과였기에 너무 기분이 좋아서 점심을 먹으며 축하주를 한잔했다. 잔을 들이키며 저절로 드는 생각. “이 맛에 변호사 하지!”. 변호사가 사건을 포기하는 순간 진실을 밝히는 것은 요원하다는 깨달음도 다시금 얻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