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판사? 나는 반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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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변호사 작성일23-02-13본문
내가 바둑을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바둑을 좋아하시는 외할아버지의 추천으로 학원을 다녔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어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에 참여했던 것 같다. 어디 까지나 취미 생활이었지만 대회도 여러 번 나갔을 정도로 나는 바둑에 진심이었다. 기력이 제일 높았을 때는 아마 3단 정도. 지금은 실력이 예전 같지 않지만 여전히 바둑 두는 걸 좋아해서 바둑 동호회에 꾸준히 출석 도장을 찍고 있다.
이런 나에게 2016년, 알파고의 등장은 정말 큰 충격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모든 바둑인들이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 5번기 대국을 둔다는 기사가 나왔을 때 알파고 개발자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프로기사들은 이세돌 9단의 우세를 점쳤고 나 역시도 이세돌 9단이 이길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세돌 9단의 4:1패. 당시 나는 알파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어 생방송으로 대국을 시청했는데, 그때 느꼈던 감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벽이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이세돌 9단이 너무 무기력해 보였다. 관전자였던 내가 그렇게 느낄 정도였으니 당사자인 이세돌 9단이 느꼈을 감정은.. 정말 가늠이 되질 않는다.
그로부터 약 7년이 지난 지금, 인공지능은 바둑의 트랜드를 바꾸어 놓았다. 수십, 수백 년 동안 최선의 수라고 받아 들여졌던 것들이 사실은 최선의 수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며, 대부분의 바둑 기사들은 과거 프로기사들의 기보가 아닌 인공지능을 통해 바둑 공부를 하고 있다. 바둑 대국의 해설에서도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승리 확률, 현 상황에서의 최선의 수 등을 바둑팬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바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손으로 나누는 대화라고 하여 '수담'이라고도 불리는데, 묵언의 대화를 통한 정신수양. 이런 바둑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지만 인공지능의 등장은 (최소한 바둑계에선)긍정적인 면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AI 판사는 어떨까. 인간 판사 대신 인공지능이 판결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에스토니아에선 2019년부터 일부 사건에 대한 판결을 AI 판사에게 맡기고 있고 미국, 싱가포르, 호주 등에서는 재판에서 AI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법거래 문제가 드러났을 때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AI판사를 도입하라.’는 청원 글이 많이 올라오기도 했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나는 AI 판사 도입에 반대한다. 우선 매년 수백 만 건 이상의 판결이 내려지지만(정확한 수는 나도 잘 모르겠다) 같은 사건은 단 한 개도 없다. 그리고 사건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관계가 정말 복잡하게 얽혀있는 경우가 많고 이런 경우에는 어떤 법이 적용되어야 하는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AI는 기존의 판결을 학습하기 때문에 판결에 녹아있는 판사의 편견을 그대로 학습할 수 있다는 문제점도 있다.
그리고 형사 사건에서는 피고인의 형량을 정할 때 고려해야하는 요소들이 정말 많은데 다른 여러 가지 사정들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법대로) 판결을 내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음주운전으로 기소가 된 경우 피고인의 정상 참작을 위해 주장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변호사마다 생각이 다르고 주장하는 바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1. 혈중 알코올 농도가 그리 높지 않다는 점(실제로 낮다면)
2. 이동한 거리가 짧다는 점(실제로 짧다면)
3.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혹은 다친 사람이 없다는 점)
4. (피해가 있었다면) 피해자와 합의를 했다는 점
5. (과거 음주운전으로 처벌 받은 전력이 있다면) 그때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점
6. 대리기사를 불렀으나 매칭이 잘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운전했다는 점
7. 평소 술자리가 있으면 꼭 대리기사를 불렀다는 점(최근 6개월 치 대리기사 호출 내역 제출)
8. 술자리가 예정되어 있으면 차를 가지고 가지 않은 적도 많다는 점(최근 6개월 치 택시 호출 내역 제출)
9. (가장인 경우) 실형을 받을 경우 남은 가족들의 생계가 위험하다는 점
10. 평소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점 등을 입증할 수 있는 표창장 등 제출
11. 반성문 및 탄원서
사실, 이것보다 더 있는데 많이 생략한 것이다. 위 목록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판결은 칼로 무를 베듯 기계처럼 딱 자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판결에는 (특히 형사나 가사 사건에서는)필연적으로 감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좀 더 공정한, 납득할만한 결론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지난 달, 인천지방법원에서는 38년 간 돌본 장애인 딸을 살해한 어머니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장기간 힘들게 장애인 딸을 돌봤고 간병 과정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은 점 등을 고려하여 실형을 선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살인죄로 기소가 된 경우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럼에도 검찰에서는 항소하지 않았고 그대로 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위 판결 내용을 다룬 기사에서는 법원과 검찰의 결정을 환영한다는 댓글이 주를 이뤘다. AI가 판결을 내렸다면, 과연 어머니에게 집행유예 선고가 내려졌을까? 이렇게 여러 가지 사정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결이 이루어지는 현 법제에서 AI 판사를 도입하는 것이 맞는지.. 나는 좀 회의적이다.
(그럼 증인신문은 어떻게 할까? 질문과 대답이 오고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증인의 미묘한 표정변화, 떨리는 목소리 이런 요소들을 AI 판사가 고려할 수 있을 리 없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까지 하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참는다.)
글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소송일기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판결문이 하나 있다. 한 번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앞부분 생략)
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 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건에서 따뜻한 가슴만이 피고들의 편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도 그들의 편에 함께 서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
4. 결 론
따라서 피고 2는 이 사건 임대주택을 우선분양받을 권리가 있고 그가 그 권리를 행사하여 원고 공사에게 분양을 요청하고 있는 이상 원고가 그 요청을 거부하고 임대차계약 기간 만료를 이유로 피고들에게 명도와 퇴거를 청구하는 것은 법상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고의 이 사건 청구는 모두 기각하여야 할 것인바, 제1심판결은 이와 결론을 달리하여 부당하므로 이를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